390조 증발한 애플이 동정 받지 못하는 이유

 

지난 625, 세계 시가총액 2위 기업의 주가가 하루 만에 6% 넘게 빠졌다. 우리 돈으로 약 390조 원이 단 하루에 증발한 것이다. 방아쇠는 손톱만 한 반도체, 메모리였다. 애플의 팀 쿡은 요즘 메모리값이 미쳤다며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대홍수다. 40년을 일했지만 이런 건 처음 본다"며 맥북과 아이패드 가격을 줄줄이 올려 버렸다. 맥북 에어는 1,099달러에서 1,299달러로 뛰었다. 원가 부담을 소비자에게 떠넘긴 셈인데, 시장은 이러한 가격 인상 조치에 싸늘하게 반응했고 주가는 그길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같은 시각, 애플이 저격한 메모리 회사들은 잔칫집이었다. 미국 마이크론의 지난 분기 매출총이익률은 무려 84.9%를 찍었다. 1년 전만 해도 39%였던 수치다. 100원어치를 팔면 85원이 남는다는, 반도체 역사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숫자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이크론 임원이 애플에 던진 말이 크게 화제가 됐다. "메모리 시장에 100년 만의 홍수가 왔다고요? 그 홍수, 사실 당신들이 만든 겁니다." 이 말의 뜻은 지금 전 세계는 AI 열풍이고, AI를 굴리는 데이터센터에는 HBM(High Bandwidth Memory : AI 연산에 쓰이는 초고속 적층 메모리)이 들어간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3사는 돈이 되는 HBM에 생산 능력을 죄다 몰아넣었다. 전체 D램 생산에서 HBM 비중은 예전 5% 안팎에서 지금은 30% 가까이 치솟았다. 그만큼 우리가 쓰는 폰과 노트북에 들어가는 범용 D램은 만들 자리가 사라졌다. 물량은 주는데 데이터센터 수요까지 겹치니, 값은 최근 3분기 만에 약 네 배가 뛰었다. 애플이 징징댄 건 HBM이 아니라 바로 이 범용 D램이었다.

 

여기서부터가 애플이 동정받지 못하는 진짜 이유다. 애플은 범용 D램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들이는 큰손이자 메모리 시장의 갑 중의 갑이었고, 무기는 장기공급계약이었다. "1년 치 물량을 통째로 사 줄 테니 값을 시장가보다 싸게 묶어라, 아니면 딴 데서 산다." 그렇게 대량 구매를 미끼로, 애플은 호황이든 불황이든 거의 자기가 정한 값에 메모리를 받아 왔다. 문제는 메모리 회사가 죽어 갈 때조차 후려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데 있다. 불과 몇 년 전인 2022, 경기가 꺾이며 메모리 시장에 빙하기가 닥쳤다. 삼성전자마저 반도체 부문에서 2023년 한 해 약 15조 원 적자를 냈고, SK하이닉스는 그해 영업손실이 77,300억 원에 달했다. 마이크론은 7년 만의 분기 적자에 매출이 반토막 나 직원의 10%를 잘랐다. 3사가 나란히 줄초상이 난 것이다. 그 와중에도 애플은 "비싸다"며 계약을 흔들고 단가를 내리눌렀다. 훗날 마이크론이 가격을 무지막지하게 후려치던 고객들 탓에 업계 투자가 줄줄이 멈췄다고 했을 때, 실명을 대지 않았음에도 업계는 일제히 애플을 쳐다봤다. 이런 상도덕 없는 행동이 부메랑이 됐다. 돈을 벌지 못한 3사는 증설도 투자도 접었고, 그 자리에 AI 수요가 폭발했다. 물량이 모자라 값이 폭등했고, 그 폭등한 값에 지금 애플이 울고 있다. 자기가 판 함정에 제 발로 빠진 꼴이다.

 

애플의 협력사에 대한 횡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3년 애플은 GT어드밴스드와 아이폰용 사파이어 독점 공급 계약을 맺고 약 57,800만 달러를 투자금으로 지원했다. 이 돈으로 GT는 애리조나에 애플 전용 공장을 지었다. 그런데 계약에는 함정이 있었다. 애플에게는 정작 그 사파이어를 사야 할 의무가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애플은 아이폰6에 사파이어를 쓰지 않았고, GT어드밴스드는 2014년 파산했다. 그 공장은 결국 경매에 넘어가 지금은 애플의 데이터센터가 됐다. 이런 사례는 널렸다. GPU를 만들던 영국의 이매지네이션 테크놀로지스는 2017년 애플이 직접 GPU를 만들겠다며 발을 빼자 주가가 하루 만에 약 70% 증발했고, 결국 매물로 나왔다. 아이폰 전력칩을 만들던 다이얼로그 세미컨덕터는 2016년 매출의 74%를 애플에 의존했는데, 애플이 이마저 직접 만들겠다며 뮌헨의 엔지니어들을 대거 빼갔다. 애플은 GPU, 모뎀, 전력칩, CPU까지 죄다 직접 설계하며 협력사를 배제하며 마진을 지켜 왔다. 혁신의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난 후 팀 쿡은 이런 식으로 애플을 운영해 온 것이다. 그런데 딱 하나, 메모리만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팀 쿡 스스로 우리가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다고 했는데, 천문학적 투자가 드는 메모리 공장만은 짓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갑질의 칼이 닿지 않는 그 한 곳에서 과거의 업보가 고스란히 되돌아온 것이다.

 

이제 갑을은 완전히 역전됐다. 메모리 3사는 장기공급계약을 걷어차고, 계약이 끝나는 시점의 값으로 다시 청구하는 사후 정산제를 꺼내 들었다. 50만 원에 계약했어도 그새 값이 두 배로 뛰면 100만 원을 되받는다. 공교롭게도 애플이 거꾸로 해 온 짓을 그대로 돌려준 것이다. 1분기 애플에 공급되는 메모리 가격을 삼성은 80% 이상, SK하이닉스는 100%나 올렸다. 1년이 아니라 한 분기 인상률이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이 부른 값을 애플은 깎지도 못하고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돈이 있어도 물건을 못 사는 시대다. 마이크론의 핵심 고객조차 필요한 물량의 절반 남짓밖에 배정받지 못하는, 사실상 배급 상태다. SK하이닉스는 2026HBM이 이미 완판됐고, 골드만삭스는 올해 D램 공급 부족을 15년 만의 최악이라 짚었다. 그런데 이 품귀에 기름을 붓는 것 또한 애플이다. 눈앞의 손해를 감수하며 시중 모바일 메모리를 비싼 값에 싹쓸이해, 자본력 약한 경쟁사의 공급선을 말려 죽이는 중이다. 과거엔 후려쳐서 굶겼고, 지금은 사재기로 굶긴다. 정작 비싸다고 우는 자가 그 값을 제일 열심히 끌어올리는 셈이다.

 

더 웃긴 건 그다음인데 값을 아끼겠다며 애플이 손을 내민 곳은 중국의 창신메모리(CXMT). 중국 정부가 밀어주는, 미 국방부 블랙리스트에 오른 기업이다. 사는 게 불법은 아니지만 사는 순간 평판도 미국 정부와의 관계도 틀어진다. 그런데도 애플은 상무부에 로비 중이다. 그러던 지난 618, 트럼프는 애플과 인텔 미국 반도체 파트너십을 발표했다. 한쪽에선 미국 반도체를 만들겠다는 애국 마케팅을 하면서 다른 쪽에선 블랙리스트 중국 칩에 로비하는 두 얼굴의 위선을 떨고 있다. 창신 칩은 3사보다 겨우 10~30% 쌀 뿐인 그 푼돈에 정치 리스크를 자초하는 미련한 짓을 하고 있다. 자체 AI마저 사실상 포기하고 새 시리를 구글 제미나이에 맡기기로 한 것이 지금 애플의 처지다.

 

정리하면 100년 만의 대홍수는 핑계다. 값이 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오를 때까지 아무 준비 없이 후려치기에만 몰두하다 막상 값이 오르니 제일 먼저 남 탓부터 꺼낸 것이 잘못인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번 사태를 애플의 업보이자, 카르마의 청산이라 부르는 이유다. 그런데 이 통쾌함을 마냥 즐기기 전에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지금 칼자루를 쥔 건 삼성과 SK하이닉스, 우리 메모리 제국이다. 하지만 갑을은 영원하지 않다. 10여년을 후려치던 애플이 지금 삼성이 부른 값을 군말 없이 치르듯, 반도체 사이클은 반드시 돌고 돈다. 승자도 마냥 깨끗하진 않다. 3사 역시 값을 담합 했다고 미국에서 집단소송에 휘말린 참이다. 게다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창신 메모리가 바로 그 왕좌를 노리고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다. 오늘 애플이 치르는 업보가 내일 우리의 이야기가 되지 말란 법은 없다. 더 이상 혁신의 아이콘이라 불리지 못하는 애플을 보고 최소한 같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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